[인사와 교제] 2021-2 안상호 재활의학과 장학생 우수설교 3選

설교1: 세상 한복판에서 거룩하게 살기

(다니엘 1:1-9)

By 김기선

 

유다에 내린 하나님의 징벌

 

하나님은 오랜 우상숭배와 완고함 때문에 남유다 왕국마저 강대국의 손에 넘기신다. 이번에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징벌하려고 드신 회초리는 느부갓네살 왕의 바벨론 왕국이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국에 여호야김 왕과 왕족들, 귀족들을 넘겨주셨다. 국권 침탈이 일어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던 성전이 더럽혀졌다는 사실이다. 부정한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전에서만 사용되던 기물들을 자기들의 신전에 갖다 바친 것이다. 신권 침탈이 일어났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은 전쟁 당사자들이 섬기던 신들 간의 전쟁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여호와의 전에 있던 기물들이 바벨론 신들의 신전에 옮겨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바벨론 왕국이 섬기던 신들에게 백기를 들고 무릎을 꿇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표면적 사건 이면에 흐르는 다른 역사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1:2). 겉보기에 여호와는 바벨론의 신들에게 짓밟힌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였다.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 뒤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 흐름을 주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패배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여전히 온 세계를 다스리고 계셨다.

사실 유다의 이러한 패망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미 예고한 것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5:3-4). 유다 백성의 비극은 그들의 귀가 어두워진 것이다. 하나님의 끈질긴 부르심에도 유다 백성은 귀를 닫고 다른 신을 섬기며 악한 길로 완고히 행했다. 이런 유다에게 징벌의 말씀이 임한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8-9).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노략거리가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역사를 경영하는 방식이었다. 유다와 사방 모든 나라를 치는 느부갓네살 왕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종에 불과했다. 이것이 표면적 역사 이면에 흐르는 진정한 진실이었다.

 

다니엘이 만난 위기

 

소년 다니엘은 주전 605년 경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1:4)한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수년 내로 유다의 요직에 올랐을법한 인물들이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런 유다의 엘리트들을 데려다가 바벨론 왕국과 자신을 섬기는 자로 길러내고자 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름도 바벨론 식으로 고치고, 제국 사관학교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다니엘은 겉으로 보기에 제국의 힘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니엘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가 하나님께 거역한 대가로 칠십 년 동안 바벨론왕을 섬기리라”(25:11)고 했다. 반면 거짓 선지자들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27:9,14)는 말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다. 다니엘의 순응은 한결같은 입장을 지니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유다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믿음의 태도였다. 겉보기에 매국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는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이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어둡고 갑갑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제국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따르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제국 사관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고,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고치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왕의 진미만큼은 먹지 않겠다고 뜻을 정하였다(1:8). 왕의 진미가 갖는 상징성은 다니엘에게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5절 말씀에 따르면 왕의 진미는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제공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매일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음식이다. 음식을 먹어야 기력이 생기고, 그 기력으로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처럼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분을 느부갓네살 왕이 친히 공급해주겠다는 것이 이 음식의 의미였다. 마치 느부갓네살 왕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너희들의 생명은 내게 달려 있고, 내가 너희 인생의 공급자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와 제국에 충성하여라.”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거절한 것은 이러한 메시지를 거절한 것과 같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인생의 공급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내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지 당신이 아니다!” 다니엘은 매일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왕의 종이 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뜻을 정하여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참된 왕이시며, 내 생명의 공급자 이심을 천명했다. 포로 다니엘은 자신의 영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제국의 한복판에서 거룩을 외치고 있었다.

 

세상 한복판에서 거룩하게 살기

 

다니엘이 처한 상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닮아 있다. 다니엘이 우상을 숭배하는 제국 한복판에서 성도로 살아가야 했듯이, 우리 또한 세상 한복판에서 구별된 주의 백성으로 살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다니엘의 숙명은 제국에서 성도로 살아남는 것이었다. 오늘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교회에서만 살 수 있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성도이고 세상 전체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성도로 살아가는 일은 한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주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지붕 밑에 살아가는 식구가,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동료와 상사들이, 내 가게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정결하게 살아가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니엘은 그런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도전한다. “누가 당신의 진정한 왕인가이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다니엘은 자신의 인생 경험으로 우리를 일깨운다. “당신의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 당신의 성공과 안전은 누구에게 달려있나? 세상 나라인가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니엘의 인생을 보여주며, “인간 나라 절대 권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권력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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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2: 옛이야기에서 발견하는 영원한 통치, 신선한 오늘

(본문 : 다니엘 7)

by 윤재덕

 

1.

이 땅의 푸르른 청소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해주려고 해요. 이 기묘한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이 옛이야기는 하늘로부터 바다에 큰바람이 불더니, 네 마리의 동물들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바다에서 올라온 동물들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기 시작합니다. 이 동물들에 관한 묘사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데요. 날개가 달린 사자가 포효하고, 사람의 갈빗대를 입에 물고 있는 곰이 입맛을 다십니다. 날쌘 표범은 머리가 넷인데 각각이 주위를 살피고 있고, 마지막으로 이빨이 쇠로 만들어진 괴물은 자신 앞의 모든 것을 부수고 있습니다. 본래 동물이란 창세기에서 아담이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들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동물들에 의해 사람들이 끔찍이 짓밟히는, 즉 유대인들에게는 창조 질서가 거꾸로 뒤집힌 것으로 읽힐 이 위기 상황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성경에서는 짐승이라 번역되었지만, 사실 원문으로는 동물과 짐승은 같은 단어를 달리 번역한 것이에요). 특히 이 네 번째 짐승의 머리에는 뿔이 열 개가 달려있는데, 이 뿔들은 돋아나기도 하고 뽑히기도 합니다. 뿔 세 개가 뽑히고 그다음 나온 뿔이 가관이었어요. 하나님께 맞서며 교만하게 떠들고 있었거든요.

좋으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좋은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 참으로 괴로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벌어집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라는 분이 자신의 보좌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이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불꽃이 일어나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로 나타나신 그분은,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시종을 드는 가운데 책들을 펴고 재판을 시작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까 넷째 짐승에게서 돋아난 작은 뿔은 여전히 교만방자한 말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로 그 넷째 짐승은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뭉그러져 타는 불에 던져 졌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짐승은 권세를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 목숨 줄만은 보존되었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의 백미인 인자 같은 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하늘 구름을 타고 그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옛적부터 계신 분은, 바로 그 인자 같은 이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주고,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짐승들이 통치하던 시절에서, 인자 같은 이가 통치하는 시절로 정권이 교체된 것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는 그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계신 이로부터 받은 권세가 영원한 권세이고, 옮겨가지 않을 것이고, 그의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 확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2.

여러분 방금 들은 이 이야기는 다름 아닌 다니엘의 환상 이야기입니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데요. 다니엘 하면 풀무 불에 들어간 세 친구 이야기는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이 환상 이야기를 세밀하게 다룬 적은 드문,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방 제국의 군홧발 밑에서 신음하던 유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자신들의 삶을 이해하게 하는 이야기,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버틸 수 있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니엘 7:15부터 읽어보면, 우리는 이 환상에 대한 해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환상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어요.

-네 마리 짐승들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네 나라이고(7:23),

-네 번째 짐승의 머리에 있던 열 뿔도 왕들을 가리킵니다(7:24).

-그리고 그 빠진 세 개의 뿔 뒤에 나타난 뿔은 교만 방자한 왕인데, 이 왕이 하나님의 백성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 승리합니다(7:25).

-그러나 옛적부터 계신 이가 등장하고 그분이 거룩한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셔서, 마침내 그들은 다시 나라를 다시 됩니다(7:26,27).

그럼 이 다니엘의 환상 이야기가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해보세요. 자신들이 마침내 나라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단순히 기대 정도가 아니라 확실한 미래라는 사실을, 바로 이 이야기에서 확인했을 것입니다. 이건 앞으로 우리 잘 될 거야식의 격려가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주신 확실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태어나시기 100여 년 전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가져다 놓으며 유대인의 심기를 자극할 때도, 유대인들은 이 다니엘의 환상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저항하고 시리아를 몰아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것을 오늘날에도 하누카라는 명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건 전쟁을 통해 시리아를 몰아내고도 다시 유대는 로마 제국의 포로가 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즉 하누카를 통해서는 다니엘의 환상에서 말하는 영원한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고, 시리아를 몰아낸 유대 영웅 마카비는 다니엘의 환상 속에 등장하는 인자 같은 이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마카비 혁명 이후에도, 다니엘의 환상 이야기는 여전히 유대인의 가슴 속에 남아있었습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시리아에 이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인자 같은 이를 기다리며 저 짐승 같은 제국들의 통치가 뒤집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3.

그 무렵 유대 땅에 나타난 한 나사렛 출신의 청년은 자신을 인자라고 칭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이 다니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었고, 그 이야기에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던 많은 유대인은 그 사람을 따랐습니다. 예언대로 짐승들의 통치를 끝장낼 것을 기대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자신을 인자라 칭한 그가 로마 제국에 의해 죽임당하셨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그를 욕하기 바빴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사흘째, 사람들의 기대 없이 그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마저도 어안이 벙벙하여 그가 다니엘의 환상을 새롭게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조차 여자들이 전했던 그이의 부활 소식에 코웃음 쳤으니까요. 그러나 이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두근거림이 가라앉고, 성령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그 부활의 의미가 드러나기를, 바로 죽고 살아난 그분께서 다니엘의 오랜 환상대로 악한 통치를 뒤집고, 옛적부터 계신 이로부터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으신 만왕의 왕이심이 선언되었습니다. 예수. 여러분과 제가 섬기는 바로 그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던 바울의 기록을 세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요.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에베소서 1:19~22, 새번역)

 

우리가 방금 함께 읽었던, 바울이 에베소 교회로 보냈던 편지의 한 대목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환상 이야기의 성취를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하나님의 우편으로 나아가셨고, 나라와 권세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는 영광을 받으신 것을 말입니다. 즉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그가 인자 같은 이로서 유대인의 오랜 이야기를 마침내 이루신 분이심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기신 것은 한낱 제국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세들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다니엘에게 주신 환상 그대로 말입니다.

 

4.

타락한 권세를 이기신 분을 따르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니엘의 이야기는 오랜 옛 이야기면서도, 곧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환상 이야기를 다니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창작한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시는 언행일치의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리고 이 이야기가 자신을 인자라 칭하신 예수와 관련이 되어있다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비출 만큼 진실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영원한 통치를 가리키고, 예수는 이 이야기를 따라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다만 다니엘이나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그 성취가 고대 되는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를 확인한 이야기라는 결정적인 차이, 곧 메시아 예수께서 만드신 차이가 있습니다. 이 결정적인 차이를 느끼며, 다니엘 7장의 한 대목을 읽어봅시다. 이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되찾은 나라의 성도 여러분.

 

내가 보고 있을 때에, 새로 돋은 그 뿔이 성도들에 맞서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들을 이겼으나, 옛적부터 계신 분이 오셔서,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의 권리를 찾아 주셔서, 마침내 성도들이 나라를 되찾았다.’ (다니엘 7:21,22,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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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3: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다니엘 4:34-35; 6:25-27

by 조영휘

 

1. 도입

 

  근래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수이념과 진보이념의 싸움이 곧 선과 악, 하나님과 마귀의 싸움인 것처럼 행동하며 말하고 있다. 물론 진보정부가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책을 펴는 것은 사실이며, 나는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성경적 윤리를 훼손하는 정당을 지지할 수 없다. 허나, 그 말이 곧 보수적인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보수적인 정당이 여당이 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란 의미는 아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최근의 정권교체를 바라보며, 진보정권의 승리가 마치 기독교의 패배인 것인 양 착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세상의 일들이 우리 맘처럼 이뤄지지 않을 때 왜 그렇게 쉽게 불안해하는가? 나는 그 이유가 우리가 멀리 보지 못하고 당장의 눈 앞의 문제만 염려하는 영적인 근시에 너무 쉽게 빠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핍박없이 평화롭게 살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대한민국이 기독교인들이 살기에 어려운 독재국가나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고 확신하는가?

(물론, 나는 대한민국이 다시 독재정권이 되거나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국가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다니엘서가 이러한 질문들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서를 미래에 있을 일들을 가늠하기 위한 책으로 대하기만 한다. 물론, 다니엘서가 미래의 일들에 대해 다루긴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니엘서를 주신 궁극의 목적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다니엘서가 주어진 궁극의 목적은 세상이 우리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심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이교도의 왕국들에 의해 나라를 잃었고, 그들의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을 잃었다. 그들은 나라와 땅을 잃었을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도 잃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브갓네살 왕의 우상을 경배하라는 핍박을 받았고 (4),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라는 억압을 받았다 (6).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교도의 신들에게 패배하셨다는 의미였는가?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패배하지 않으셨음을 명쾌히 가르친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이교도의 왕국에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었다고 다니엘서는 말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이 여전히 하늘에서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시절의 암울한 국가적 상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전 우주의 통치자이신 사실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오늘의 본문에서, 두 명의 강력한 이교도 왕들은 다니엘의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고 있다. 아래의 본문을 읽어보자.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다니엘 4:3435)


‘25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되 원하건대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다니엘 6:2527)

 

2. 말씀의 대지: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완전하며 영원한 주권으로 다스리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1)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며 영원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4:34b; 6:26b).

 

  우리가 자주 쉽게 영적 근시에 빠지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 들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라. 그는 나라를 잃었고 바빌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영적인 근시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일들 뒤에 일어나는 일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느브갓네살의 두번째 꿈을 해석하면서 하는 다니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왕국을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왕국이 견고하리이다” (4:25b, 26b). 느브갓네살 왕은 어쩌면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했던 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왕을 앞에 두고 다니엘은 실제로 누가 전 우주를 통치하고 계셨는지 잘 알았다.

  다니엘의 경고를 흘려들은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이 성취한 일들을 생각하며 교만함에 빠지고 일곱 때동안 산짐승과 같은 생활을 한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칠년이라 생각하지만 히브리어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그것이 정확히 일곱 날, , , 혹은 해였는지는 사실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이 강력한 왕을 들짐승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냐는 것이다. 정신이 돌아온 뒤 느브갓네살 왕이 말한다: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4:34b).

다니엘이 사자의 굴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다리오 왕도 같은 종류의 찬양을 다니엘의 하나님께 올린다;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6:26b).

이 두 왕의 고백은 이스라엘이 왕국을 잃고 종교의 자유를 잃는 그 순간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전히 세상을 통치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진보 정권이 들어왔을 때 누가 세상을 통치하고 계셨는가? 반하나님, 반기독교적 법들이 통과가 되는 이 순간 누가 세상을 다스리시는가? 진보매체가 기독교에 대해 악의적인 기사를 쓰고, 세상이 기독교를 비웃고 있을 때 누가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며 영원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2)하나님의 완전하신 통치가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4:35).

 

  전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며 영원하다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는 권능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땅 위에 어떠한 대적도 없었던 느브갓네살 왕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4:25).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1) 누구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2)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신다: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3) 누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토를 달 수 없다: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너무 빠르게 의구심을 갖지 말라. 성경을 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강하시며, 지혜로우신지 배우라. 많은 성도들이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일어난 일들의 모든 이유를 알게 될 거예요라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옳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물론, 천국에 가면 내가 지금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자신의 행하신 일의 이유를 나에게 낱낱이 설명해 주셔야 할 의무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이유를 알든지 모르든지, 나에게는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며, 전능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의무가 있다.

 

3)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6:27).

 

 다니엘이 기적적으로 사자의 굴에서 전져진 뒤 다리오가 선포한다: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 (6:27).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하신 통치가 자신의 백성을 위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큰 격려를 받을 수 있다. 다니엘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큰 위험에서 건져 주셨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성도들이 모든 환란과 위험에서 건짐 받을 것이란 의미인가? 물론, 아니다.

예레미야는 다니엘 사역의 초기에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을 했었다. 예레미야가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신뢰했는가? 그렇다. 그가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가 다니엘처럼 큰 위험에서 건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다니엘과는 다르게 예레미야는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많은 물리적 핍박을 받았다 (20:1-2; 37:13-16; 43). 2 세기의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예레미야가 이집트에서 자신 바른 예언에 질린 광폭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했다 (Scorpiace, 3 ). 다니엘과 예레미야 둘 다 하나님께 신실했으나 그들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의 신비를 발견한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다니엘은 건지시고 예레미야는 건지지 않으셨는지를 정확히 알 순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선하시고,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다르게 다루시는 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공정하지 않으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 어떠한 부당함이 있을 수 있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대답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18:6).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이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며 지혜로우시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큰 보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진리이다.

다니엘 7:13-14 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가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예수님)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다니엘은 예언한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7:27).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를 받는 대언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성취되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부활 후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8). 더불어 성도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왕국의 왕과 제사장이 되었다 (1:13; 벧전 1:9; 2:4-6; 1:4-6). 복음 안에서 다니엘의 예언은 성취되기 시작했고 우리는 이 예언의 완전한 성취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5:10; 20:6).

 

3. 결론

 

  나는 아래의 질문으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고자 않다. 당신은 다니엘이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편안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다니엘의 삶이 예레미야의 삶보다는 질이 높았음이 자명하다. 허나, 그것이 다니엘의 안락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왕국의 회복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이교도의 왕을 섬겨야 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이교도 문화를 향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많은 신약성도들이 반 기독교적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보며 놀라워하는 모습으로 인 해 놀란다. 그들이 읽고 믿는 신약이 이미 죽음과 고통의 책이지 않나? 복음서가 우리의 주님의 고난과 죽음의 책들이지 않나? 사도행전이 초대교회가 받은 핍박의 역사이지 않은가?

신약의 서신들이 핍박 받는 성도들이 핍박 받는 성도에게 쓴 편지들이 아닌가? 우리가 핍박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딤후 3:12). 그리고 우리가 받는 현재의 고통은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할 수 없다 (고후 4:17-18).

대한민국은 우리의 왕국이 아니며, 하나님의 왕국은 여전히 굳게 서있다.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완전하며 영원한 주권으로 다스리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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