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와 교제] 설교 독후감
[독설 讀說]
175편의 설교를 읽었다. 누구 설교를 읽고 평할 깜냥이 아니지만 주어진 일이어서 꾸역꾸역 읽었다. '꾸역꾸역' 읽었으니 설교를 대하는 좋은 자세는 아니었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다. 설교 읽기를 끝내고 (온라인으로) 대면한 시간에 말을 많이 했는데 기억나는 대로 몇 가지만 남겨 본다. 하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다 못한 이야기도 조금 덧붙인다. 상기해보니 다 내가 스스로 들어야 할 말이라서 마치 거짓말을 한 것처럼 부끄럽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부끄럽지만 참고 남긴다.
1. 말도 그렇지만 글을 쓸 때는, 특히 설교문과 같이 유의미한 글을 쓸 때는 문장에 유의하자. 아무리 애써도 비문과 오기가 전혀 없는 글을 쓰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힘쓰자. 그리고 문장이 길어질수록 비문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긴 문장이 힘에 부친다면 짧은 문장을 사용하자.
2. 생각을 정치하게 하고 글을 정치하게 쓰자. 한 낱말 한 문장을 의미없이 흘리지 말자. '사용'과 '이용'이 어떻게 다른지, '예수'와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지, '구원'과 '구속'은 또 어떻게 다른지 얼른 얼른 변별할 수 있어야 한다. '겸손'이나 '온유'의 국어사전적/문화사회적 의미가 성경의 의미와 같은지 다른지 혹은 어느 정도는 겹치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설교자의 에토스와 파토스는 말이 되기 전에 글에 먼저 담긴다. 로직(만)이 곧 설교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4. 설교에는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일상 언어를 쓰자. '언약 신학' 강의를 듣고 설교에 녹여낸다고 '언약 신학'이니 '무조건적 언약'이니 '조건적 언약'이니 할 필요가 없다. 개념어를 사용하면 의미는 개념어에 갇히기 십상이다. 개념어를 사용하지 않고 개념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깊은 공부가 필요한 까닭이다.
5. 설교의 청자가 개인일 수도 있고 대중일 수도 있지만, 설교는 거의 반드시 교회와 관련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설교는 교회로 초청하는 것이거나 교회 혹은 성도에게 혹은 그 교회에 속한 신자에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성과 무관한 위로나 도전 같은 건 설교가 아니다.
6. 이 설교를 꼭 교회에 와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기독론도 없고 교회론도 없고 종말론도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설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교회 밖에도 청중에게 용기를 주고 도전을 주는 프로그램은 많다. 밑도 끝도 없이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척 사랑하신다. 힘 내라. 힘 낼 거지? 아멘 하자' 한다면 그것이 무슨 기독교의 설교이겠나.
7. 설교자가 교단과 교파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교단과 교파의 풍미에 푹 전 설교는 하지 말자. 성경은 자체로 힘이 있고 교회는 교회 자체로 생명이 있다. 교단과 교파가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 설교자도 교단과 교파의 담장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성경 바깥으로 나오라는 말이 아니고 자유주의 신학을 권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교단 신학이 아닌)의 넓은 세계로 들어오라는 말이다.